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 예브게니 수드빈 + 오스모 벤스케 &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2018. 1. 3. 01:52Classical Music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부터 꺼내보자면 '예브게니 수드빈' 은 2018년 서울시향의 2번째 공연에 협연자로 온다.(2월1일) 페스티벌의 성격이 강한 신년음악회를 제외한다면, 시즌의 첫번째 공연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첫번째 공연부터 심상치않은 사람이 찾아올 예정이다. 바로 예브게니 수드빈이다. 수드빈은 한국에 그렇게 잘 알려져있지 않은 피아니스트이다. 평소에 BIS 레이블에 관심이 있다면 알겠지만... 관심이 없다면 글쎄? 정말 오랜만에 만난, 음색이 상당히 독특한 피아니스트이다. 즉, 필자가 좋아하는 자신의 색깔이 보이는 피아니스트이다. 수드빈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를 들고 서울시향과 협연한다.




    

<할매와 미남의 만남. 근데 벤스케도 가까이서보니 꽃할배이더라>



수드빈의 음색은 굉장히 청아하다. 처음에 이런 타건소리를 들으면서 어떻게 묘사해야, 소리가 아닌 글자로 잘 전달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방금 생각난 단어가 '청아하다' 이다 (이거쓸려고 몇번이나 지웠는지 모른다.) 소리 하나하나가 굉장히 맑으면서 힘이 있다. 클래식에서 주로 사용하던 단어인 '투명하다' 는 느낌과는 좀 다르다. 그냥 소리가 맑은 물 같다. 아 몰라. 그냥 들어봐. 애플뮤직에 있어요


관련해서, 수드빈은 굉장히 파트너를 전략적으로 고른 듯 하다. 그의 뒤를 지켜주고 있는 것은 오스모 벤스케와 미네소타 오케스트라이다. 이제는 서울시향에 1년에 한 번씩은 오시는 분이시기에, 꽤 익숙한 오스모 벤스케이다. 공연장에서 한 번이라도 그의 음악을 접했다면, 그가 얼마나 개성있고 설득력있게 음악을 만들어가는지 충분히 알 것이다. 바로 그가 만들어내는 상쾌한 하모니를 말이다. 벤스케는 침엽수림 한가운데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처럼 음악을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다. 그만큼 담백하고 모든 소리를 질서있게 끄집어낸다.




"오케스트라의 음량을 키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예상할 수 있는 방법이죠. 단원들에게 '더 크게 연주하가' 고 주문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전체적인 음색이 바뀌게 됩니다. 저는 다른 방법을 쓰죠. 키우려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의 음량을 줄이는 겁니다. 상대적인 거니까요. 그렇게 하고나면 여지가 생깁니다. 뭔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죠"


- 월간 SPO 2015년 11월호-




한 명은 타건감으로 청아함을 만들어내고, 또 다른 한 명은 지휘봉으로 시원한 침엽수림을 만들어낸다. 둘의 조합이 기가막히게 잘 어울릴 수 밖에 없는 느낌이다. 그렇기 때문에 둘의 음반을 들어보면, 오케스트라와 협연자가 서로 대화를 나눈다는 의미가 무엇을 뜻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수드빈의 음색은 '황제' 에서 만들어내는 스케일링에서 매우 잘 표현된다. 연속된 음을 주르르르륵 주르르르륵 쳐서 음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거 말이다. 아마 들으면 알꺼다. 소리를 크게 만들때는 앞 뒤를 적절하게 끊어줘서 다음 패시지로 넘어가는데 윤활유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작은 소리일 때는 그 나름대로의 음색때문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큰 매력이 있다. 이런 점도 벤스케와 매우 닮았다. 벤스케의 휘몰아치는 바람속에서도 고요해지는 프레이즈는 엄청난 집중력을 이끌어낸다는 마법을 우리는 이미 서울에서 여러번 체험했다.


DG에서 발매된 김선욱의 베토벤과 비교하면 그 차이점이 더 명확해진다. 김선욱의 타건은 기본적으로 매우 무겁다.(망치로 뚜드리는거같다) 최근에 서울시향과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도 '증명' 했듯이, 김선욱이 만드는 음악세계는 다소 전통적인 베토벤을 주류일 수 밖에 없다. 김선욱은 소리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면서, 다소 힘겹고 장엄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까는게 아니다) 수드빈은 통통 튕기듯 탄력적으로 곡을 이끌고 나간다. 


<황제는 괜찮지만 운명은 무너졌다...왠지 명언같다...>



같이 커플링되어있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도 5번못지않게 매우매우 훌륭하다. 필자는 그동안 주로, 4번의 3악장이 아주 장대하게 펼쳐지는 해석을 즐겨듣곤 했는데, 이제는 그 레퍼런스가 바뀔 뜻도 하다. 매우 날렵하고, 맑으면서 깡단있게 밀어붙이는 해석에 한동안 넋을 잃고 들을 뿐이다.